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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SAD] 이달의체육인 : 사격-김임연 2007.12 (대한장애인체육회)

관리자
2007-12-11 16:38:20
조회 3,321
이달의 체육인
국제사격대회 금메달 31개의 주인공’
* 본란은 스포츠 전문 월간지SPORTSON에서 제공하는 기사입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군중들의 시선 속에 한 여자가 울고 있다. 2004년 9월 19일, 아테네 패럴림픽 여자 10m 공기소총 입사 경기가 치러진 마르코폴로 사격센터는 한 여자의 눈물 때문에 숙연해졌다. 여자 10m 공기소총에서 금메달을 기대했던 한국의 김임연이 결선 6위로 경기를 마치고 흘린 눈물은 승자의 환호만큼이나 주목을 받았다. "너무 속상했어요. 차라리 속 시원하게 울자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물론 (이전까지 패럴림픽 3연패를 했다고 하더라도) 금메달을 따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대회를 위해 4년 동안 많은 준비를 했는데 그 과정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는 게 억울하고 속상했어요. 그때의 충격으로 은퇴까지 생각했어요." 은퇴를 거론한 그를 주저앉힌 것은 주변의 간곡한 만류 때문이었다. '이대로 포기하면 나중에 후회할 것이다', '한국 장애인 사격을 위해서 은퇴를 재고하라'는 등의 설득과 권유가 끊이지 않았다. 결국 사격에 대한 미련을 끊지 못한 김임연은 다시 총을 들었다. 그리고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훈련에 임했다. "아테네대회 때 사실 몸이 안 좋았어요. 임파선에 무리가 많이 가 약물 치료를 해야 했지만 도핑 문제로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었어요. 거기다 당시 몸 상태로는 무리하다 싶은 훈련량을 소화했어요. 그때 이후 경기력과 성적 등에 대한 마음가짐이 많이 달라지기는 했지만요." 김임연은 아테네대회 이후 컨디션과 집중력 위주의 훈련 프로그램을 가지고 국내외 대회에 참가했다.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강도 높은 훈련이 쉽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9월 태릉에서 열린 경찰청장기 공기소총에서 600점 만점으로 1위를 차지했다. 임신 5개월이던 2006년 12월 아시아태평양대회 3관왕 이후 또 한 번의 쾌거였다. "1달 반 남짓 훈련하고 경찰청장기에서 우승하니 사람들이 많이 놀라더군요. 또 아시아대회 때는 임신 상태라 총을 가슴에 견착하기도 힘들었어요. 참가까지는 망설임이 컸지만, 막상 총을 잡으니 스스로 대충하는 것은 용납하지 못하게 되더라고요. 아테네대회가 저를 정신적으로 한 단계 성숙시켰어요."

"이제 금메달 집착은 없어요"

김임연은 2008년 베이징패럴림픽 참가가 유력하다. 이미 치러진 대표 선발 1, 2차전을 1위로 통과했기 때문. 2008년 3월과 4월에 열리는 3, 4차전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야 하지만, 벌써 2위와의 격차가 10점으로 벌어져 이변이 없는 한 북경행은 거의 확실하다. 아테네 좌절이 컸던 그에게 베이징패럴림픽은 적지 않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제가 금메달만 꿈꿀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는 않아요. 큰 욕심이 없어요. 마음의 여유가 있다고 할까요. 지금은 사격을 참 편하고 재미있게 하고 있어요. 사격을 통해 기쁨과 슬픔을 맛보며 인생을 알았기 때문이겠죠. 사격을 하면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저 그 순간을 느끼며 늘 최선을 다해요. 물론 (웃으며) 성적이 좋다면 나쁘지는 않겠죠." 그는 이제는 자기 컨트롤이 가능하다고 했다. 솔직히 기자는 그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고도의 집중을 요하는 사격선수가, 또 세계 정상급 기량을 갖춘 선수가 총을 쥔지 28년 만에 자기 컨트롤이 가능하다? 사격은 종목의 특성상 이변이 많이 발생한다. 선수 심리에 따라 기록이 요동치기 일쑤다. 때문에 대회마다 우승자가 자주 바뀐다. 그러나 김임연은 지금까지 국제대회 금메달만 31개에 이른다. "지금까지는 성적에 많이 집착을 했어요. 성적에만 매달리다 보니 한번 흔들리면 제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아테네 때도 그랬고. 어떻게 보면 사격선수 같지 않았지요. 이제 그런 부분들은 없어진 것 같아요. 결과에 집착하지 않으니 오히려 사격도 더 잘 되고 또 성적도 좋게 나오더라고요." 그러나 김임연은 한국 장애인 사격의 에이스다. 그를 잇는 후배들이 무럭무럭 성장한다 해도 당장 그를 대체할 선수는 없다. 일례로 지난해 아시아태평양대회 때 임신으로 대회 참가에 난색을 표했지만, 한국장애인사격연맹의 간곡한 요청으로 어쩔 수 없이 총을 들었다. "주변의 기대를 알고 있어요. 예전 같지는 않지만 전혀 부담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죠. 그러나 금메달을 지상과제로 삼고 싶지는 않아요. (성적과 무관하게) 사격선수 김임연이 살아 있다는 것만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그리고 베이징패럴림픽 이후 은퇴도 고려하고 있는데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네요. 사격에 대한 아쉬움이 클 것 같아서요."

"성적보다 관중 앞에서 경기했으면……"

지난 해 11월 김임연은 한국 장애인체육사에 한 획을 그었다.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에서 열린 APC(Asia Paralympic Committee) 선수위원회 선수대표 선거에서 선출됐기 때문. 자금을 앞세운 중동의 기세에 밀려 대한장애인체육회조차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아 기쁨은 더 컸다.
선수위원으로 지낸 1년여 동안 그는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10월에도 중국 광저우에서 열린 선수위원회 회의에 다녀왔어요. 4년 임기 동안 아시아 장애인 스포츠 발전에 이바지하고 싶어요. 또 유렵 위주의 국제 장애인 스포츠에서 아시아 목소리를 키우고 싶기도 하고요. 내년부터는 국내에서 아시아 선수들끼리 워크숍도 할 것 같아요. 아시아 장애인 선수들의 교류를 위해 현재는 연락망을 구축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어요." 김임연은 국내 장애인 스포츠에도 좀 더 따뜻한 여건이 조성됐으면 하는 바람을 나타냈다. 패럴림픽 같은 국제대회가 아니라면 스포트라이트는 늘 비장애인 스포츠에 집중되고 또 기업들도 장애인 스포츠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소속팀 KB국민은행만 해도 장애인 선수는 김임연이 유일하다. "그래도 저는 많은 혜택을 받고 있지만, 다른 장애인 선수들은 소속팀조차 없어 어려움이 많아요. 제 사례 이후 많은 팀에서 장애인 선수 영입을 고려했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대다수 포기했어요. 물론 기업이 홍보를 목적으로 스포츠단을 운영하는 만큼 (주목받지 못하는 비장애인 선수들을 외면하는 것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좀 더 따뜻한 시선을 보내줬으면 좋겠어요." 김임연은 현재 한국체육대학원에서 특수체육 전공으로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박사과정을 끝마치고 교수가 되는 게 꿈이다. 지금까지 자신이 받은 만큼 장애인 체육을 위해 봉사하고 싶기 때문이다. "국내에 장애인 체육 전문가는 거의 없어요. 사회복지 관련 업무를 하시는 분들이 대개 담당하거든요. 제가 교수 혹은 행정가로서 장애인 체육에 이바지하고 또 제자들이 바통을 이어받아 활동한다면 언젠가는 장애인 체육도 비약적으로 발전하겠지요. 궁극적으로는 장애인 체육이 비장애인 체육과 동등한 위치에 섰으면 좋겠어요. 2000년 한국시리즈에서 (만원관중 앞에서) 시구를 했는데, 그때의 야구장 풍경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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